한덕수 (19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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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덕수는 1907년 대한제국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중 노동 운동에 참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운동을 벌이다 투옥되었고, 해방 후에는 재일본조선인연합회(조련) 결성을 주도했다.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결성 이후 의장으로 활동하며 북한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1958년 조총련 의장으로 선출된 이후 권력을 집중시키고, 조선대학교 설립 등 재일 조선인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2001년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에도 조총련과 북한 간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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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중앙상임위원회 의장 - 허종만
허종만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고성 출신으로 조총련에서 활동하며 간부직을 역임하고 의장까지 지냈으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노력영웅 칭호를 받는 등 북한 정권과의 관계를 유지했으나, 북한산 송이버섯 부정 수입 혐의로 논란이 된 인물이다. -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중앙상임위원회 의장 - 서만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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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보는 조총련 중앙의 기관지로, 재일 조선인 사회 소식과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기사를 다루며 김정남 암살 사건 등 국제 이슈에 대해 북한 시각을 반영하고 대한민국과 미국 언론 보도를 비판하는 논조를 보인다.
한덕수 (190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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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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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07년 2월 18일 |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군 내남면 동호동 (대한제국) |
사망일 | 2001년 2월 21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
이름 | |
한글 | 한덕수 |
한자 | 德 |
로마자 표기 | Han Deoksu |
정치 | |
소속 정당 | 조선로동당 |
경력 | |
직책 |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임기 시작 | 1967년 11월 |
임기 종료 | 2001년 2월 21일 |
역대 수장 | 김일성 (1948년 - 1994년), 김정일 (1994년 - 2011년) |
기타 직책 1 | 초대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중앙상임위원회 의장 |
직책 2 | 최고인민회의 의장 |
임기 2 시작 | 1972년 |
임기 2 종료 | 1986년 |
수상 | |
훈장 | 김일성훈장 김일성상 공화국 로력영웅 칭호 조국통일상 국기훈장 제1급 자유독립훈장 공화국 창건 기념 훈장 총련 결성 기념 훈장 |
가족 관계 | |
친척 (정치가) | 김병식 (의붓 동생) |
2. 초기 생애와 교육 (1907-1931)
한덕수는 1907년 2월 18일 대한제국에서 한기만과 장내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그는 4년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닌 후,[2] 성악가를 꿈꾸며 1927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음악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 2년 후 그는 대신 도쿄의 일본 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신문 배달원으로 일하다가 중퇴했다. 이후 그는 노동 운동에 관심을 돌려 1931년 전일본노동총동맹 산하의 일반노동조합 도쿄 지부에 가입했다.[2]
2. 1. 일본 유학과 노동 운동
한덕수는 성악가를 꿈꾸며 1927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음악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2] 2년 후 일본 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신문 배달원으로 일하다가 중퇴했다.[2] 이후 노동 운동에 관심을 돌려 1931년 전일본노동총동맹 산하의 일반노동조합 도쿄 지부에 가입했다.[2]3. 항일 운동과 투옥 (1931-1945)
1933년 8월, 한덕수는 아타미로 이주하여 히가시즈 노동조합 상임위원이 되었다.[2] 1934년 9월, 단나 터널 건설 현장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동료 한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노동 쟁의를 조직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여러 차례 체포와 투옥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한국인의 권리를 옹호했다.[1]
3. 1. 아타미 이주와 노동 운동
1933년 8월, 한덕수는 아타미로 이주하여 히가시즈 노동조합 상임위원이 되었다.[2] 1934년 9월, 단나 터널 건설 현장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동료 한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노동 쟁의를 조직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여러 차례 체포와 투옥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한국인의 권리를 옹호했다.[1]3. 2. 반복된 체포와 투옥
한덕수는 1934년 9월 단나 터널 건설 현장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동료 한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노동 쟁의를 조직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2] 1933년 8월, 아타미로 이주하여 히가시즈 노동조합 상임위원이 되었다.[2] 그는 여러 차례 체포와 투옥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한국인의 권리를 옹호했다.[1]4. 해방 이후 활동과 조총련 결성 (1945-1955)
1945년 9월 이후 한덕수는 재일본조선인관동지방협회의 대표를 역임했고, 같은 해 10월 조선인연맹(조련, ちょうれん/朝聯일본어) 결성을 주도하여 가나가와현 본부 및 중앙 본부 위원장을 역임했고, 이후에는 총무국장을 지냈다.[2] 1945년 10월 15일,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제1회 중앙위원회에서 총무부 국장에 선출되었으나,[7] GHQ로부터 공직 추방을 당했다.[7] 1949년 6월 27일, 북한에서 통일 전선 조직인 조국전선이 결성되자, 다음 날인 28일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대표로서 조국전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8] 1955년 5월 25일, 북한의 해외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이 결성되자, 한덕수는 6명의 의장단 중 한 명으로 선출됨과 동시에[9], 다음 날인 27일 제1회 중앙위원회에서 중앙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10]
4. 1.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활동
1945년 9월 이후 한덕수는 재일본조선인관동지방협회의 대표를 역임했고, 같은 해 10월 조선인연맹(조련, Chōren) 결성을 주도하여 가나가와현 본부 및 중앙 본부 위원장을 역임했고, 이후에는 총무국장을 지냈다.[2] 1945년 10월 15일,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제1회 중앙위원회에서 총무부 국장에 선출되었으나,[7] GHQ로부터 공직 추방을 당했다.[7] 1949년 6월 27일, 북한에서 통일 전선 조직인 조국전선이 결성되자, 다음 날인 28일에는 조련 대표로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8]4. 2.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위원
1949년 6월 27일, 북한에서 통일 전선 조직인 조국전선이 결성되자, 다음 날인 28일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대표로서 조국전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8]5. 조총련 의장 활동과 북한과의 관계 (1955-2001)
1949년 12월, 조련이 일본 정부에 의해 해산 명령을 받자, 한덕수는 일본 공산당 민족대책부 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51년에는 북한 조선로동당 선전부에서 기증받은 출판물을 판매하여 그 수익금으로 재일 한국인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구월서방(九月書房)을 열었다.[2]
1952년 한덕수는 조선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조선문제연구》라는 잡지를 발행하며 사상 및 문화 투쟁을 전개했다.[2] 이후 김일성의 주체사상 노선에 따라 기관지인 《조선신보》 재발행과 도쿄에 기반을 둔 조선통신사 업무 재개를 포함하여 재일 한국인 동포 운동을 재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1]
1955년 5월 25일, 북한의 해외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이 결성되자, 6명의 의장단 중 한 명으로 선출됨과 동시에[9], 다음 날인 27일 제1회 중앙위원회에서 중앙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10] 1956년 5월의 제2회 전체대회 및 1957년 5월의 제3회 전체대회에서 의장단 중 한 명으로 유임되었다.[11] 1957년부터 2001년 2월 사망할 때까지 의장단으로 활동했다.[1]
1958년 5월의 제4회 전체대회에서 의장단이 해체되고, 새롭게 의장·부의장제가 도입되자, 한덕수는 단일 의장으로 선출되어 권력을 집중시켰다.[12] 이 체제하에서 민족 교육, 문화, 예술, 출판, 보도, 재정 및 경제를 포괄하는 대규모 조직 체계가 구축되었다. 그는 비주류 파를 배제했다.[2]
1949년 6월 평양에서 열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창립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2] 이후 일관되게 친북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1967년, 그는 제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2] 1972년 백남운의 뒤를 이어 의장직을 승계하여 1986년까지 역임했다.[2]
1968년 조선대학교 학장으로 임명되었다.[2] 1970년경 김병식 부의장이 그에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면서 소란이 있었지만 이를 해결하고 2001년 사망할 때까지 조총련 의장직을 유지했다.[2] 그는 일본 각지에 조선학교를 개설하여 재일 조선인의 생활 향상에 노력했다.
5. 1. 조총련 의장 취임과 권력 집중
1958년 5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제4차 전체대회에서 의장단이 해체되고 단일 의장·부의장 체제가 도입되면서 한덕수는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2] 이 체제하에서 민족 교육, 문화, 예술, 출판, 보도, 재정 및 경제를 포괄하는 대규모 조직 체계가 구축되었다.[2] 그는 비주류 파를 배제하고 권력을 집중시켰으며,[2] 1970년경 김병식 부의장의 공개적인 반기를 해결하고,[2] 2001년 사망할 때까지 조총련 의장직을 유지했다.[2]5. 2. 주체사상과 북한과의 관계
한덕수는 1952년 이후 김일성의 주체사상 노선에 따라 기관지인 《조선신보》 재발행과 도쿄에 기반을 둔 조선통신사 업무 재개를 포함하여 재일 한국인 동포 운동을 재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1] 1949년 12월, 조련이 일본 정부에 의해 해산 명령을 받자, 일본 공산당 민족대책부 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51년에는 북한 조선로동당 선전부에서 기증받은 출판물을 판매하여 그 수익금으로 재일 한국인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구월서방(九月書房)을 열었다.[2]1952년 조선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조선문제연구》라는 잡지를 발행하며 사상 및 문화 투쟁을 전개했다.[2] 1955년 5월 25일, 북한의 해외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이 결성되자, 6명의 의장단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고,[9] 다음 날인 27일 제1회 중앙위원회에서 중앙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10] 1958년 5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제4차 전체대회에서 비주류 파의 배제를 포함하여 의장단을 해산하고 단일 의장/부의장 체제를 도입했으며, 그는 의장으로 선출되었다.[2][12] 이 체제하에서 민족 교육, 문화, 예술, 출판, 보도, 재정 및 경제를 포괄하는 대규모 조직 체계가 구축되었다.
1949년 6월 평양에서 열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창립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된 이후,[2] 1957년부터 2001년 2월 사망할 때까지 의장단으로 활동하며[1] 일관되게 친북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1967년, 제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2] 1972년 백남운의 뒤를 이어 의장직을 승계하여 1986년까지 역임했다.[2] 1970년경 김병식 부의장이 그에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면서 소란이 있었지만 이를 해결하고 2001년 사망할 때까지 조총련 의장직을 유지했다.[2]
5. 3. 조선대학교 설립과 교육 사업
1968년 한덕수는 조선대학교 학장으로 임명되었다.[2] 그는 재일동포 민족 교육 사업에 주력하였으며, 1958년 5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제4차 전체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이후[2] 2001년 사망할 때까지 조총련 의장직을 유지하며 조선학교를 개설하여 재일 조선인의 생활 향상에 노력했다.[12] 1970년경 김병식 부의장이 그에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기도 했지만, 한덕수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의 직위를 굳건히 지켰다.[2]5. 4.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의장 역임
한덕수는 1967년 제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2] 1972년 백남운의 뒤를 이어 최고인민회의 의장직을 승계하여 1986년까지 역임했다.[2]6. 비판과 논란
한덕수는 권력욕이 강했고, 의제인 김병식 제1부의장이 조선총련을 사유화하여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자, 김일성에게 요청하여 김을 실각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15]
조총련 간부들은 1990년대 초 매우 적은 급여로 생활고를 겪었지만, 한덕수와 그 가족은 도쿄의 대저택에서 가정부, 보디가드, 개인 비서, 자녀들의 학원 강사, 요리사, 운전기사 등을 고용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4] 그의 어린 딸들은 리무진을 타고 통학했다.[4]
한덕수는 조선총련 의장으로서 재일 조선인의 애국 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북한으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았으며, 김일성의 장례식 때는 장례위원회 서열 4위에 올랐다. 일본의 정치인들과도 두터운 인맥을 유지했다. 권력욕이 강하여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김병식 제1부의장을 김일성에게 요청하여 실각시키기도 했다.[15]
한덕수 사망 후, 북한에서의 조선총련의 영향력은 저하되었지만[16], 2011년에는 재일 조선인 기업을 북한에 유치할 목적으로 한덕수 10주기 추도회를 개최하는 등 한덕수 개인의 영향력은 남아있다.[17]
6. 1. 권력욕과 김병식 숙청
한덕수는 권력욕이 강했고, 의제인 김병식 제1부의장이 조선총련을 사유화하여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자, 김일성에게 요청하여 김을 실각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15]6. 2. 호화로운 사생활
조총련 간부들은 1990년대 초 매우 적은 급여로 생활고를 겪었지만, 한덕수와 그 가족은 도쿄의 대저택에서 가정부, 보디가드, 개인 비서, 자녀들의 학원 강사, 요리사, 운전기사 등을 고용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4] 그의 어린 딸들은 리무진을 타고 통학했다.[4]한덕수는 조선총련 의장으로서 재일 조선인의 애국 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북한으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았으며, 김일성의 장례식 때는 장례위원회 서열 4위에 올랐다. 일본의 정치인들과도 두터운 인맥을 유지했다. 권력욕이 강하여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김병식 제1부의장을 김일성에게 요청하여 실각시키기도 했다.[15]
7. 사망과 장례
2001년 2월 21일, 한덕수는 일본 도쿄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이후, 소만술을 장으로, 호종만을 부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가 구성되었다.[5]
7. 1. 사망
2001년 2월 21일, 한덕수는 일본 도쿄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이후, 소만술을 장으로, 호종만을 부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가 구성되었다.[5]7. 2. 장례와 조문
2001년 2월 21일, 한덕수는 일본 도쿄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이후, 소만술을 장으로, 호종만을 부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가 구성되었다.[5]8. 저서
wikitext
- 《주체적인 해외 교포 운동의 사상과 실천》 (미래사, 1986년)
9. 평가와 영향
조선총련 의장으로서 재일 조선인의 애국 운동에 기여한 공적으로 북한으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았다. 김일성의 장례식 때는 장례위원회 서열 4위에 올랐다.[15] 또한, 일본의 정치인과도 두터운 인맥이 있었다. 권력욕이 강했고, 의제인 김병식 제1부의장이 조선총련을 사유화하여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자, 김일성에게 요청하여 김을 실각시켰다.[15] 한덕수 사망 후, 북한에서의 조선총련의 영향력은 저하되었지만,[16] 2011년에는 재일 조선인 기업을 북한에 유치할 목적으로 한덕수 10주기 추도회를 개최하는 등 한덕수 개인의 영향력은 남아있다.[17]
9. 1. 재일동포 사회에 대한 영향
조선총련 의장으로서 재일 조선인의 애국 운동에 기여한 공적으로 북한으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았다. 김일성의 장례식 때는 장례위원회 서열 4위에 올랐다.[15] 또한, 일본의 정치인과도 두터운 인맥이 있었다. 권력욕이 강했고, 의제인 김병식 제1부의장이 조선총련을 사유화하여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자, 김일성에게 요청하여 김을 실각시켰다.[15] 한덕수 사망 후, 북한에서의 조선총련의 영향력은 저하되었지만,[16] 2011년에는 재일 조선인 기업을 북한에 유치할 목적으로 한덕수 10주기 추도회를 개최하는 등 한덕수 개인의 영향력은 남아있다.[17]9. 2. 북한과의 관계와 영향력
한덕수는 조선총련 의장으로서 재일 조선인의 애국 운동에 기여한 공적으로 북한으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았다. 김일성의 장례식 때는 장례위원회 서열 4위에 올랐다. 또한, 일본의 정치인과도 두터운 인맥이 있었다. 권력욕이 강했고, 의제인 김병식 제1부의장이 조선총련을 사유화하여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자, 김일성에게 요청하여 김을 실각시켰다. 한덕수 사망 후, 북한에서의 조선총련의 영향력은 저하되었지만, 2011년에는 재일 조선인 기업을 북한에 유치할 목적으로 한덕수 10주기 추도회를 개최하는 등 한덕수 개인의 영향력은 남아있다.9. 3.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한덕수는 조선총련 의장으로서 재일 조선인의 애국 운동에 기여한 공적으로 북한으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았다. 김일성의 장례식 때는 장례위원회 서열 4위에 올랐으며, 일본의 정치인과도 두터운 인맥을 유지했다.하지만 권력욕이 강해 의제인 김병식 제1부의장이 조선총련을 사유화하여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자, 김일성에게 요청하여 김을 실각시켰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한덕수 사망 후 북한에서의 조선총련의 영향력은 저하되었지만, 2011년에는 재일 조선인 기업을 북한에 유치할 목적으로 한덕수 10주기 추도회를 개최하는 등 한덕수 개인의 영향력은 남아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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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rman Han Duk Su of CHONGRYUN Passes 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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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総連初代議長の10周忌、北朝鮮で盛大に開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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